‘전두환 회고록’의 5·18단체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 판결 (11) (명예훼손 손해배상 위자료 7,000만원, 2018나24881)

1-21p.524피살경위를 알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의 시신을 끌고 다니며 계엄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수법 등도 고도의 심리전 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조직적으로 개입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광주 효천역 부근에서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과 보병학교 교도대 간에 벌어졌던 오인 사격 사건에도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수준의 공작원들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삭제
1-22p.527 ~528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날인 5월 22일 오전,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등에는 그동안 시위 현장에서 볼 수 없었던 일단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추측들은 엇갈리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 수백 명을 헤아리는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나타났던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목격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복면을 하고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온갖 억측과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유지 (허위성입증 부족)
그 당시 시민군 측이 방송을 통해 광고했던 내용처럼 광주시민들의 투쟁을 지원하려고 서울서 내려온 연․고대생이 맞을 거라는 얘기가 있고, 한편으로는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라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기도 한다.삭제
1-23p.530당시 북한 간첩들에게 지령하는 무전 교신들은 우리 군당국에 의해 포착되고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황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는 진술들이 있다.유지 (허위성입증 부족)
1-24p.530연․고대생으로 소개됐다는 500~600명의 정체, 조직적으로 움직인 수백 명 규모의 집단이 실재했느냐의 여부, 복면한 사람들의 정체 그리고 5.18사태에 북한은 어느 정도 개입했었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 내가 이 글에서 확신을 갖고 새삼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유지 (사실적시불인정)
1-25p.5315.18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 군당국이 무전교신을 포착함으로써 북한 간첩들이 시위현장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민들 속에 섞여 있는 북한 특수부대원들을 찾는다고 대규모 군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시가전을 한다는 의미다. 내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내전이 벌어진다면 북한에 전면 남침의 초청장을 보내는 것이 된다.삭제
1-26p.532지금 와서 5.18사태 때 북한이 개입한 상황을 왜 밝혀내지 못 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니까 하는 얘기일 뿐이지 그 당시에 는 내가 아닌 그 누구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민 속에 숨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북한 특수부대원 들을 잡기위해 시가전을 각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계엄군이 치밀한 계획 아래 정교한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광주를 수복할 수 있었는데, 북한의 특수요원들이 그때까지 광주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삭제
1-27p.532북한의 5.18광주사태 개입과 관련한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아쉽지만 미완의 과제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유지 (사실적시불인정)
1-28p.5331990년대 이후 탈북자들 가운데에는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했 다는 것은 북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 당시 북한의 특수요원으로 광주에 침투했던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들었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2006년에는 자신이 직접 북한의 광주 작전에 참전했던 북한 특수부대원이었다는 사람이 탈북해서 그 사실을 털어놨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이들의 발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것 이어서 지어낸 말로 보기는 어렵다삭제
1-29p.533 ~5345.18사태 당시 광주 현장에 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기자의 목격담 이외에 관련 자료나 정황 증거 등을 들어 연․고 대생으로 알려졌던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의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10여 년간 집중적인 조사와 연구, 출판활동 등을 통해 5.18광주사태와 관련된 진실을 규명해나가고 있는 지만원 시스템공학 박사는,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북한의 특수군을 투입해서 공작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만원 박사는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기록, 안기부의 자료, 5.18관련 단체 들의 기록물, 북한 측의 관련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조사 분석한 결과 그러한 결론을 얻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북한 특수부대원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탈북군인과 귀순한 북한 요인들의 증언으로 그러한 주장은 뒷받침됐다고 말하고 있다.삭제
1-32p.540 ~541배후조종에 의한 폭동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배후가 바로 ‘북한’이라고 특정特定하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지만원 시스템공학박사와 재미 역사학자인 김대령 목사 등은 연구․저술을 통해 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도시게릴라 작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양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피해자 측이 만든 자료들, 북한의 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벌인 ‘도시게릴라전’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탈북한 북한 고위층 인사들과 군인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주장이다삭제
1-33p.541지만원 박사는 5.18때 북한의 특수공작원으로 침투했다가 돌아가 그 뒤 북한의 정부와 군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수 백 명의 인물을 사진분석을 통해 실명으로 밝히고 있고 그 내용이 특정 보도매체와 출판물, 인터넷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지만 주요 언론매체들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 독자나 시청자들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언론매체들, 여론의 향배를 좇을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계에서조차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어떠한 ‘수정주의적’접근도 금기禁忌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은 뚜렷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삭제
2-29p.485국군 공수부대 병력은 사람의 살을 도려낼 만큼 예리한 칼을 휴대하지 않았다.삭제
2-33p.5185.18사태 때 계엄군은 광주시내는 물론 광주시 외곽 등 여러 곳에서 흉기 또는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양상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 곳은 모두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주 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 170명, 강력범 300여 명을 포함해 총 2,64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유지 (허위성입증 부족)
2-33p.518수용자들을 자극해 교도소 내 폭동을 유발하려는 의도였을 것 이다. 북한이 광주에 있는 여러 고정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포착되었다.삭제
2-34p.519 ~520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처음 습격한 것은 5월 21일 12시경 이었다. 당시 교도소는 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무장시위대는 총을 난사하며 공격해 왔다. 그러자 전교사는 교도소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3공수여단을 긴급증파했었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 20분경 교도소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31사단 병력과 교체된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 총격을 가해왔다. 3여단 15대대장의 임무 교대 중 바로 옆에 있던 무전병이 저격을 당했다. 유지 (허위성입증 부족)
권총을 차고 한눈에 고위 지휘관인 것을 알고 잠복해 있던 무장시위대가 저격을 한 것인데 빗나가서 바로 곁에 있던 무전병이 맞은 것이다.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처럼 대담 하게 나오기 어렵다.삭제
2-36p.521 ~522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광주 사태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전쟁 수행 중의 점령군 또는 혁명적 상황에서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다. 5.18 당시 그들은 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그처럼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미전향 장기수들, 엄중한 정치범들, 간첩들을 해방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삭제
2-37p.522
5.18사태가 수습된 뒤, 특히 ‘민주화’ 이후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담은 기록물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때의 활약상에 따라 적지 않은 ‘민주화 유공 보상금’도 지급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나선 사람은 없다고 한다.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이야 죽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살아 도망간 사람들도 있을 텐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이다.유지 (허위성입증 부족)
그렇다면 교도소 습격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우리 국민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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