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회고록’의 5·18단체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 판결 (5) (명예훼손 손해배상 위자료 7,000만원, 2018나24881)

4. 이 사건의 쟁점

가. 총론적 쟁점들

위와 같은 주장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에서 원고들의 각 청구의 당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각 주제별로 개별 판단이 필요한 쟁점들(사실의 적시 여부, 허위성, 고의· 과실과 위법성 등의 쟁점들) 이외에 모든 주제에 공통되어 그 당부를 우선 일단락지어 놓는 것이 바람직한 성격의 이른바 ‘총론적 쟁점들’이 있다.

그중 일부는 각론에 관련된 세부 판단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내용도 없지 않으나, 판결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를 따로 떼어 정리하는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것에 해당하는 총론적 쟁점으로는, ① 전두환이 이 사건 회고록에 서술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 표현들이 ‘원고 5·18단체들에 관한 것’임을 수용자 입장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인지[이른바 ‘피해자 특정의 문제’로서 그 표현의 내용을 주위 사정과 종합하여 볼 때 그 표시가 피해자를 지목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면 된다고 보는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0다50213 판결 등 참조)에 비추어 이 사건의 경우를 따져보아야 한다], ② 만약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들이 허위사실일 경우, 그것을 출판물에 인쇄하여 배포함에 따라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이 훼손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③ 이와는 별도로 원고 조○대의 청구와 관련하여, 만약 ‘계엄군의 헬기사격’과 관련한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들이 허위사실로 인정될 경우, 그것으로써 망인인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훼손되거나 또는 유족인 원고 조○대의 사회적 평가 내지 고인에 대한 명예감정, 추모감정을 침해하게 되어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지[서울고등법원 2000. 1. 20. 선고 98나44705 판결은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과 관련한 인격권 침해의 내용을 위와 같이 정리하여 그 유족이 하는 정정보도 등 청구의 당부를 판단하였고, 대법원은 그러한 원심의 판단 기준을 수긍하고 그대로 유지하였다(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참조)], ④ 저자인 전두환과는 별도로 출판자인 피고 전재국에 대해서도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등으로 정리하여 볼 수 있다.

나. 각 주제별 표현들(각론)과 관련한 쟁점들

이 사건 회고록에 나타난 각 표현행위들로 원고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또는 유족으로서의 추모 감정 등이 훼손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개별적 판단에 관하여는 각각 ① 의견표명이나 단순한 논평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표현들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정할 수 있는지, ② 위와 같이 확정한 적시 또는 암시 사실이 각 허위인지, ③ (만약 허위라면) 그 허위사실의 적시가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을 저해하는 것과 개별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④ ‘계엄군의 헬기 사격’ 관련 표현들에 관해서는 그것이 조비오 신부의 조카인 원고 조○대의 유족으로서의 추모감정 등을 훼손하는 내용인지 등을 원고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와 손해배상청구의 당부 판단에 공통된 쟁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와 관련해서는, ⑤ 위 각 표현들이 허위라는 점 및 그 표현으로 각각 원고들의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고의 또는 과실이 있었는지, ⑥ 피고들이 주장하는 명예훼손 특유의 위법성조각사유(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항변)가 인정될 수 있는지 등을 추가로 판단하여야 한다.

이처럼 원고들은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출판 등 금지청구와 함께 손해배상청구를 하고 있는바, 출판 등 금지청구의 법적 성격은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이므로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인정되면 해당 표현의 삭제를 명할 수 있고 표현행위자의 고의·과실 또는 위법성은 따로 요하지 않으나(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0다60950 판결 등 참조), 이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위와 같이 고의·과실, 위법성 등의 요건이 추가로 인정되어야 한다.

5. 판단

가. 총론적 쟁점들에 관하여

1) 피해자 특정 여부

공표된 사실적 주장에 의하여 피해를 받은 자라 함은 그 공표내용에서 지명되거나 그 공표내용과 개별적인 연관성이 있음이 명백히 인정되는 자로서 자기의 인격적 법익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그 침해상태의 배제를 구할 이익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구 언론기본법 및 방송법상의 정정보도명령 청구권자의 범위에 관한 대법원 1986. 1. 28. 선고 85다카1973 판결, 대법원 1991. 1. 15. 선고 90다카25468 판결 등의 취지를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을 행사하는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다듬었다).

명예훼손에 의한 불법행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가 특정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 특정을 할 때 반드시 사람의 성명이나 단체의 명칭을 명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의 성명이나 단체의 명칭을 명시하지 않거나 또는 두문자나 이니셜만 사용한 경우라도 그 표현의 내용을 주위사정과 종합하여 볼 때 그 표시가 피해자를 지목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0다50213 판결 등 참조).

앞서 본 기초사실 및 갑 제1 내지 5, 12, 13, 21, 22, 30 내지 34, 36, 37, 38, 45, 48, 53, 56, 57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실 및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전두환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원고 5·18단체들의 명칭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더라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표현들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사실적 주장의 대상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묵시적으로나마 지목하고 있다는 점을 이 사건 회고록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가) 전두환은 이 사건 회고록의 5·18민주화운동 관련 서술에서,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 집결해 수백 대의 차량을 끌고 나간 사람들(406쪽)”, “시위대는 (중략)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470쪽)”,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수준의 공작원들(524쪽)”,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518쪽)”,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520쪽)”, “그들은 왜 (중략)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522쪽)”,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522쪽)”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을 (자신의 시각에서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더해) 직접 지목하였다.

또한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480쪽)”, “헬리콥터에 장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482쪽)”,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은 세력(541쪽)”, “사람들은 (중략) 나에게 5.18사태의 진실에 관해 물었다(381쪽)”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사실적 주장과는 반대되는 사실 인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여러 차례 지목하였다.

전두환이 지목한 사람들은 대체로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 관련 연구자,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으로 좁혀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들은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원들이기도 하다.

전두환이 원고 5·18단체들 개개의 명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위와 같이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자신의 사실적 주장과 반대되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무리를 포괄적으로나마 언급한 이상,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을 접하는 일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나) 원고 5·18단체들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당시의 임의단체 시절에서부터 정부의 인가를 받은 민법상의 사단법인을 거쳐, 현재는 5·18유공자법에 따라 설립·운영되는 법정단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1995. 12. 21.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민주화운동법’이라 한다)은 정부로 하여금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제5조)고 규정하였는데, 원고 5·18단체들은 오랫동안 5·18민주화운동의 책임자 처벌, 진상규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과 관련한 활동을 주도하면서 위 기념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여 왔고, 정부도 예산지원 등의 방법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후원하여 왔기 때문에 원고 5·18단체들의 존재 및 활동에 관한 사실은 우리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개개 단체 명칭까지는 아니더라도 ‘5·18 관련 단체들’로 묶여서는 상당한 수준의 저명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 5·18유공자법 제96조는 5·18민주유공자나 그 유족 또는 가족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영리단체를 조직하거나 그 밖에 단체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제1항), 원고 5·18단체들과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여 오인 우려가 있는 단체를 설립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제2항).

그리고 이러한 취지의 규정은 2002. 1. 26. 법률 제6650호로 5·18유공자법이 제정된 이래 계속 유지되어 왔다(제정 당시의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68조 등 참조).

이처럼 오래 전부터 아무나 5·18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를 설립하거나 표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현재의 원고 5·18단체들은 종전 단체의 지위를 승계하여 이제 법정단체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은 전부 그 역사적 사실을 기념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피고들의 의문제기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온당하지 않다.

5·18민주화운동에 관련된 허위사실의 적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 5·18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잠재적인 피해자가 무한정 생길 수 있는 등의 부작용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라) 오히려 앞서 본 여러 사정에다가,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관계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 미치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고려하면(예를 들어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 속에는 북한군 특수요원이 섞여있었다’라는 사실적 주장은 곧바로 참여자들과 그 유족으로 구성된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이 사건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언급하면서 특별히 5·18단체들의 명칭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일반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 사실관계에 대한 언명 자체가 5·18단체들에 대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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