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회고록’의 5·18단체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 판결 (8) (명예훼손 손해배상 위자료 7,000만원, 2018나24881)


나. 각 개별표현들(각론)에 관하여

1) 전제되는 법리

개별 표현들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의 확정과 그 허위성 등을 판단함에 있어 기준으로 삼을 법리들은 아래와 같다.

○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의 적시란 반드시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에 한정할 것은 아니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의 전 취지에 비추어 그와 같은 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또 이로써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의 구체성이 있으면 족하다(대법원 2006. 5. 12. 선고 2004다35199 판결 등 참조).

○ 사실을 적시하는 표현행위뿐만 아니라 의견 또는 논평을 표명하는 표현행위도 그와 동시에 묵시적으로라도 그 전제가 되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면 그에 의하여 민사상의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고(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등 참조), 일정한 의견을 표명하면서 그 의견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따로 밝히고 있는 표현행위의 경우에도 적시된 기초 사실만으로 타인의 사회적 평가가 침해될 수 있는 때에는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다(대법원 2009. 4. 9. 선고 2005다65494 판결 등 참조).

○ 책에 쓴 사실적 주장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되려면 적시된 사실이 특정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것으로서 허위이어야 하는데, 그 허위 여부의 판단에서는 일반 독자가 그 책의 내용을 접하는 통상의 방법을 전제로 그 글의 전체적인 취지와의 연관 아래에서 글의 객관적 내용, 사용된 어휘의 통상적인 의미, 문구의 연결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독자들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여기에다가 그 책 내용의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속에서 당해 표현이 가지는 의미를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대법원 2012. 11. 15. 선고 2011다86782 판결 등의 취지 참조).

○ 명예는 생명, 신체와 함께 매우 중대한 보호법익이고 인격권으로서의 명예권은 물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배타성을 가지는 권리라고 할 것이므로, 사람의 품성, 덕행, 명성, 신용 등의 인격적 가치에 관하여 사회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인 명예를 위법하게 침해당한 자는 손해배상(민법 제751조) 또는 명예회복을 위한 처분(민법 제764조)을 구할 수 있는 이외에 인격권으로서 명예권에 기초하여 가해자에 대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침해행위를 배제하거나 장래에 생길 침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침해행위의 금지를 구할 수도 있다.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한 방해배제청구권으로서 삭제 청구의 당부를 판단할 때는 그 표현내용이 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 아닌 기사로 인해 현재 원고의 명예가 중대하고 현저하게 침해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지를 언론의 자유와 인격권이라는 두 가치를 비교·형량하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고, 피고가 그 표현이 진실이라고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등의 사정은 형사상 명예훼손죄나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부정하는 사유는 될지언정 삭제를 구하는 방해배제청구권을 저지하는 사유로는 될 수 없다(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0다60950 판결 등 참조).

○ 법인도 자신들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위법한 표현행위 등에 대하여 부작위청구권을 행사하는 권리주체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06. 5. 26. 선고 2004다62597 판결 등 참조).

2) 인정사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과 그에 맞선 광주시민·학생들의 민주화운동 전개 과정)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을 통하여 전두환이 명시적으로 적시하거나 또는 간접적 우회적인 방법으로 암시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의 허위성 여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판단의 기초가 되는 실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 사건(헌정질서 파괴 범죄로 평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다)의 개요와 위와 같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서 헌법제정권력인 국민들의 저항권 행사라는 입법적·사법적·정치적·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 각 사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피격 사망에서부터 광주시민들의 저항권 행사를 무력으로 제압한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의 실행 및 이에 뒤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라 한다)를 통한 정권 장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관하여,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지의 사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대법원 확정판결로 인정된 사실 및 갑 제12, 13, 21, 22, 30, 31, 32, 37, 38, 40 내지 43, 48호증, 을 제1, 121 내지 124, 179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인정되는 사실 중 논란의 여지가 없거나 적은 부분만을 정리한 것이다.

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이른바 ‘정규육사’ 1기)로 졸업한 이래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대리 겸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대통령 경호실차장보, 국군보안사령관 등의 직책을 차례로 거치면서 권력의 동향과 정국의 향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79. 10. 26.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연회를 하던 도중 권총으로 박 전 대통령을 쏘아 사망하게 하였다(이하 김재규에 의한 박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10·26 사건’이라 한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서거에 따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전두환은 10·26 사건을 수사할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직무유기혐의로 구속하였는데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하 ‘정승화 총장’이라 한다)이 위 사람을 석방하는 등 10·26 사건의 책임자 처벌 범위에 관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전두환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에 대하여 정승화 총장이 나무라거나 주의를 주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1979. 11. 무렵에는 이른바 ‘정치군인’들을 전역시켜야 한다는 군(軍) 내의 여론과 관련하여, 정승화 총장이 군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정리하겠다고 말하는 등 전두환과 같이 정치와 관련된 보직에서 상당기간 근무한 일이 있는 장교들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박종규, 신윤희,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고인들 중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이들로서 이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라 한다)은 정승화 총장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군의 실권을 장악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 집단적 또는 개별적, 순차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에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을 지지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군인, 공무원 등을 규합·확산하고 그에 대한 반대세력을 약화·동요시키기 위해 1979. 12. 12.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또는 보안사령부 소속 군인들을 시켜 정승화 총장을 군법회의법 등으로 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총장 공관 주변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등의 실력행사를 거쳐 위법하게 체포하였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위와 같은 행위를 군사반란으로 인식하고, 이를 저지 또는 진압하기 위해 일선 부대에 정식 지휘계통을 통하지 않은 누군가의 출동명령에는 일절 응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자신들이 지휘할 수 있는 몇몇 부대들을 출동시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장세동의 사무실인 제30경비단장실에 모여 일종의 ‘지휘부’를 구성한 상태에서 군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사사로운 영향력을 이용해 서울 인근, 수도권 등지에서 전격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였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 측 병력은 병기를 휴대한 채 서울로 진주하여 윤성민, 장태완, 정병주 등 군내 반대세력들을 제압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 중앙청 등을 모두 점령하였다.

이어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머물던 공관 주변을 군인들로 에워싸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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