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회고록’의 5·18단체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 판결 (9) (명예훼손 손해배상 위자료 7,000만원, 2018나24881)


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등의 군사반란과 내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위와 같이 12·12 군사반란에 성공한 뒤, 노태우는 수경사령관에, 유학성은 제3군사령관에, 황영시는 육군참모차장에,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에, 주영복은 국방부장관에,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에 각 취임하여 군의 지휘권을 명실상부하게 장악하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다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여 정보기관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군을 포함한 국가권력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980. 5. 초부터 전두환의 지시에 의하여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과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이 비상계엄의 확대, 국회해산,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준비했다. 위 이학봉 등은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정호용 등과 회동하여 이를 검토하고, 이희성, 주영복에게도 이를 설명하여 그들의 협조를 받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이학봉 등은 예비검속대상자, 권력형 부정축재를 이유로 재산을 몰수할 대상자, 정치활동을 금지할 대상자 등을 선정하였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1980. 5. 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그들로 하여금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건의하는 결의를 하도록 하였다.

군부의 의견이 있는 것을 내세워,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상대로 같은 날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한 상태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5. 18. 01:45 무렵부터는 무장한 군인들을 국회의사당에 배치·점거하여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5. 20. 무렵에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등 일련의 군사반란 및 내란 행위를 감행하였다.

다) 5·18민주화운동의 전개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유혈 진압

한편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포함한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의 실행을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진압을 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를 그 진압에 투입할 것을 계획하였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 미리 전국의 대학과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투입하는 조치를 취해놓았다.

위와 같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계엄군 배치 계획에 따라 특전사 7공수여단 병력들이 1980(이하 이 항에서는 모두 1980년을 의미하므로 연도 기재를 생략한다).

5. 18. 01:10 무렵 M-16 소총 등을 휴대한 채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점거하였다. 5. 18. 10:00 무렵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생에 대한 구타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위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며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와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5. 18. 10:30 무렵 다른 학생 600여 명과 함께 광주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 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 등 시위가 광주 시내 중심가로 점차 확산되었다.

위 공수부대원들은 5. 18. 16:00 무렵 시위대와 맞서고 있는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금남로 일대로 이동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시민들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때리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진압을 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5. 19. 00:50 무렵 11공수여단 병력들이 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광주에 증파되었다.

이들은 차량에 탑승하고 배속 받은 장갑차의 선도로 광주시민들 앞에서 위력시위를 하였다.

그런데 청각장애인 김경철(남, 23세, 최초 사망자)이 전날 계엄군의 진압봉에 맞아 부상을 입고 국군광주통합병원에 후송되었다가 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5. 19. 10:00 무렵 일반 시민들까지 대규모로 시위 학생들에 가세하여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였다.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착검한 총을 휘두르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중 김안부(남, 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2번째 희생자, 그에 관하여는 실제로 총상으로 사망하였음에도 사망 원인에 관한 검시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5. 19. 16:30 무렵에는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의해 포위되자 총기를 발포하였고, 그로 인해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이 총상을 입었다.

5. 20.에도 오전부터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시민·학생들 사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혀진 채 구타를 당하는 등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계속되었고, 이를 목격하고 격분한 택시기사들은 5. 20. 오후 무등경기장 앞으로 일제히 모여 200여 대의 택시에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차량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흥분한 일부 시민들이 트럭, 버스 등을 타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기도 하였다.

3공수, 7공수, 11공수여단 병력은 이에 맞서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한 강경진압을 계속하였고, 5. 20. 23:00 무렵 광주역 앞에서는 3공수여단 12, 15대대 병력이 시위대의 차량 돌진에 대응, 발포하면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5. 21. 12:00 무렵 3공수여단 병력은 전남대학교 앞에서 차량 돌진 등을 시도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광주시민이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5. 21. 13:00 무렵에는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접근해 오는 시위대에 일제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까지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 발포하여 박민환(남, 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위와 같은 집단 발포 직후에는 전남도청 주변뿐 아니라 전남대 부근에서도 계엄군의 총기 사격이 이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집 앞에 나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최미애(여, 23세)가 총격을 받고 쓰러져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소,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 부근 일대에서 이들과 수차례 총격전을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의 무장 저항이 격해지자 계엄군은 5. 21. 저녁 무렵 병력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시키되, 광주의 저항 움직임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시 외곽 봉쇄작전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시 외곽 봉쇄 과정에서 계엄군은 아래 표와 같이 시위대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무차별 총격을 가해 어린이를 포함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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